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대체역사 (문단 편집) ==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환도]]하지 않았을 경우 ==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 안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6.25 전쟁이 멈추고 난 후에 수도를 서울로 환도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현재 대한민국이 핵무기 외에는 모든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을 압도함에도 안보 위협이 지속되고 주도권을 항상 북한에 내주고 끌려다니는 것, 20대 남성 인구가 줄어들어 저학력자, 학폭가해자, [[지적장애]]인까지 징병시키는데도 병력 유지가 어려워 사단들을 해체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서울이 휴전선에서 너무 가까워 야포 포격 사거리 안에 들어가고 적에게 공간을 내주면서 시간을 버는 기동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지리적인 불리함''' 탓이 가장 크다. 그래서 [[판문점 선언]] 후 남북군사회담에서 북한 측이 전방 병력을 뒤로 물리자는 제의를 했을 때 대한민국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왜 한국인들은 수도를 옮기지 않았냐고 의아해했고[[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3&aid=0003491713&date=20191206&type=1&rankingSeq=10&rankingSectionId=104|#]]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의 경우 1963년에는 공주에, 1980년대에 대전에 수도를 마련할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그걸 실행하기 전에 [[10.26 사건|사망했고]] 실질적인 후임인 전두환이 박정희가 해오던 정책 상당수를 백지화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핵개발과 수도이전이 백지화되어 서울이 수도로 남은 것이다.]과 노무현 대통령[* 수도이전은 헌법재판소의 태클로 실패하고 [[세종특별자치시]]가 세워져 일부 정부기관만 이전되었다.]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려 했던 것도 이런 문제점 때문이었지만, 이미 서울이 행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너무 비대해져서 이제 와서는 수도 이전이나 행정수도 건설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만약 전쟁 후에도 부산에 수도를 그대로 두었거나, 창원 등 후방지역에 새 수도를 설치하여 [[천도]]했다면 북한군의 재래식 포격은 큰 안보 위협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설령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여 한강 이북을 북한군에게 일시 빼앗겼다 해도 기동 방어를 통해 오히려 북한군을 끌어들여 섬멸할 공간의 여유가 충분했을 것이므로 안보적 리스크도 훨씬 줄어들고 북한이 무력도발할 경우 지금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보복공격도 가능했을 것이며 현재처럼 군복무에 문제가 많은 청년까지 마구 징병해 현역판정률이 90%가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훨씬 더 여유를 갖고 대북 군사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가상역사에서는 실제역사처럼 좁은 FEBA지역에 병력을 과도하게 집중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기에 대한민국의 징병제가 병사의 자택 출퇴근을 허용하고(자대배치도 연고지를 적극 고려하는 식), 외출ㆍ외박을 자유롭게 하는 식으로 보다 유연하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500년 수도인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여 방어적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적어도 분단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것을 예상하고 대비한다는 의미다. 이승만 정권 내내 정론으로 취급되던 북진통일론이 좀더 일찍 약화될 수 있었다는 것. 한편 수도의 지위를 잃고 최전방에 놓이게 된 서울은 쇠락했을 것이며, '서울'이라는 이름도 새로운 수도에게 넘겨져 어쩌면 다시 한양시, 한성시 등으로 되돌려졌을 수도 있다. 서울의 도시 범위 역시 원도심에 해당하는 [[사대문 안]], [[성저십리]](+ [[서울특별시/영등포|영등포]] 일대[* 경기도 영등포시로 분리되었을 수도 있다.]) 정도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경주시|경주]]나 [[개성시|개성]]처럼 [[서울 한양도성]], [[사대문 안]],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 유적들을 중심으로 '''옛 조선 왕조의 수도'''라는 역사적 정통성만을 유지한 채 대한민국의 지방 중추도시이자 군사+관광도시 역할을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실제 역사에서 [[베트남]]의 [[후에]]의 운명과 비슷한데, 실제 역사에서 후에는 수백년간 [[응우옌 왕조|베트남 왕국]]의 수도였으나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기에 발전한 [[호찌민 시|사이공]](식민지배 하에 발전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부산하고 유사하다)과 전통적인 고도이자 통일 베트남의 수도가 된 [[하노이]]에 밀려 쇠락했고 한국의 [[경주시|경주]]처럼 역사관광도시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물론 서울은 후에와 달리 하노이랑 비견될 정도로 더 전통이 유구한 대도시였기 때문에 남북 최전방에 끼어 중부 일개 도시로 전락해버린 [[후에]]만큼 쇠퇴하지는 않았겠지만. 후에라는 도시는 응우옌 왕조가 새로 건설한 행정도시이기 때문에 도시 규모는 별거 없었고 지금은 얼마 안 떨어진 [[다낭]]의 위성도시처럼 되어버렸으나, 서울은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라 그리 쉽게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